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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은 : 선의 안무가에서 면의 건축가로

 

권영진(미술사)

 

20세기 말 회화가 지존의 위치에 있던 전통적인 ‘미술’의 종언이 선언되고, 사진과 영상, 미디어, 오브제가 그 자리를 대체하여 탈 장르 동시대 미술의 시대가 열린 지도 한 세대 이상 지났다. 그러나 형태와 색채로 화면을 구성하는 회화의 아성은 여전히 건재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과 영상,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회화를 중심으로 한 예술의 독창성 신화는 깨졌지만, 형태와 색채로 시각적 조형을 구사하는 회화의 기능과 위상은 여전히 사진도, 영상도, 디지털 그래픽도 참조해야 할 시각예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다채롭게 확장된 시각문화의 시대에, 회화는 매체의 재창안을 위해 반드시 참조해야 할 시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재현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회화의 혁신을 모색하는 흐름은 유럽에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회화의 임무에 의문을 갖은 화가들은 형태와 색채로 전개할 수 있는 다양한 형식실험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단일시점 원근법이 아닌 다시점으로 대상에 대한 다면적 정보를 한 화면 위에 펼쳐놓기도 하고, 매끈한 붓터치로 대상의 사실적 일루전을 만들어내던 오랜 관성에서 벗어나 화면 위에 물감의 재질감이나 붓질의 제스처로 작가의 내면이나 표현적 감정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또한,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빛과 움직임, 역동성 등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요소를 화폭에 잡아 놓으려고도 했으며, 대상의 가변적인 외형을 포착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형태의 원형을 찾으려고도 했다. 형태를 보조하던 색채를 해방시켜 색상 자체로 화면을 채우기도 하고, 화면 위에 글자를 쓰거나 인쇄물을 오려 붙여 회화면의 평면적 실체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화가들이 회화면과 붓과 물감을 새롭게 직시하면서 생긴 일이다. 산업화로 새로운 근대사회가 펼쳐지는 변혁의 시대에 화가들은 그간 재현의 도구로 당연시하던 화폭과 화구를 새삼스레 바라보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외적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회화의 오랜 관습은 의심에 부쳐지고, 화가들은 그들이 마주한 화면과 손에 들고 있는 붓과 물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철저하게 검증해야 했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존경할만한 영웅, 아름다운 영지, 이상적인 전원, 정교한 기물들을 그리는데 역량을 발휘하던 화가들은 그들의 직업적 장인 회화면을 그 자체로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그림을 주문한 페이트런보다 화면과 마주한 화가의 존재가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림은 화가들의 드높은 자의식을 동반했고, 회화 매체의 형식 미학을 기쁘게 발견한 화가들은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예술과 자율적인 예술가를 꿈꿀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각 예술의 고유한 매체적 특성을 주목하는 흐름은 미술 외의 영역에서도 20세기를 특징짓는 현상이었다. 종교적 의례나 문학적 서사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각 장르의 고전적 어법에서 벗어나 매체 자체의 특성으로 음악과 무용, 건축을 작동시키려는 흐름이 미술에서의 형식발견과 동일한 기류를 이루며 발전했다. 즉 고전적 정형시에서 벗어난 현대시, 음과 리듬 자체로 구성되는 현대음악, 몸짓이나 움직임을 그대로 드러내는 현대무용 등이 세기의 전환기에 서구 예술의 공통된 특성인데, 이것은 형태와 색채 그 자체로 화면을 구성하는 현대미술과 유사한 동인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미술의 맹주로 군림한 회화는 화면 위에 점, 선, 면의 형태적 요소와 물감의 색채적 요소로 구성된다. 형태와 색채의 배합으로 화가들은 회화 평면 위에 생생한 인물을 묘사할 수도, 드넓은 3차원적 공간감을 만들어낼 수도, 현실적인 촉각을 환기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회화 매체를 새롭게 발견한 화가들은 형과 색 본연의 요소로 화면을 구성하는 형식실험에 집중했다. 오로지 그림으로 말하고, 오로지 그림으로 존재하는 회화의 형식실험은 20세기 서구 미술의 뚜렷한 성취였으며, 종국에 회화의 평면성에 입각한 엄정한 추상 미학으로 번성했다. 화가가 화폭에 붓과 물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화면 위의 형태와 색채로 어떠한 공간과 감각, 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회화 세계의 새로운 발견은 20세기 초 서구 미술의 혁신이자 여러 화가들이 기쁘게 매진한 새로운 회화의 과제였다. 그것을 좁고 편협한 추상의 미학으로 강령화하거나 서구 밖에 보편적 당위로 전가하는 과정에 반(反) 모더니즘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붓과 물감, 화폭은 여전히 화가들이 검증해야 할 매우 구체적인 매체로 보인다.

20세기 후반 본격적인 서구식 산업화에 돌입한 우리의 입장에서 서구의 형식주의는 한동안 의심할 여지 없는 시대의 과제였으나, 재현도 형식도 미처 충분히 익히기 전에 모던의 한계를 지적하는 포스트모던의 거센 반격을 받아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린 것 같다. 2003년 작업실의 정물과 테이블 위의 가방 등 일상 기물을 그린 연작으로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해은은 이후로도 정물, 화분, 정원 등 일상의 장면을 소재로 하여 굵고 리드미컬한 색선을 중첩시키는 표현적 회화 연작을 선보였다. 10여 년간 전원 풍경과 콘서트홀, 경기장, 다리와 선박, 대도시, 증권시장, 역동적인 군무의 무용수 등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이해은은 일상과 영화, 게임 등에서 모티브를 얻지만, 그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거기서 얻은 감흥과 에너지, 시각적 영감을 화폭에 옮기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척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은이 반복적으로 그리는 화면 위의 색과 선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해은에게 회화면은 현실보다 즐거운 세계이고 무궁무진한 흥미의 공간인 것 같다.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인 색선의 중첩, 역동적이고 즉흥적인 필치, 밝은 원색의 단선으로 이해은은 일상과 여행에서 얻은 감정과 활기를 펼쳐놓는데, 이러한 그녀의 그림에서 변화무쌍한 빛과 대기에 매료된 인상주의 화가들, 새로운 회화를 시도하기 위해 햇살 가득한 남부 유럽을 찾은 야수파 화가들, 북해와 발트해 연안에서 격정적 필치의 회화를 모색한 다리파 화가들, 포효하는 경주용 자동차와 역동적인 기계문명에 열광한 미래파 화가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이해은의 그림이 20세기 초 유럽 전위 회화의 답습일 필요는 없다. 모네의 지베르니 연못 위에서 씨름을 벌이는 21세기 초 이해은의 자화상은 회화면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낱낱이 검증하고 샅샅이 실행에 옮기겠다는 다부진 고심이자 야심만만한 도전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유럽의 여러 화가들을 격동케 한 회화의 자기 발견, 이해은은 거기에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무엇보다 회화면이 그녀의 관심이고 조형적 실천이 그녀의 흥미이기에, 책과 사진에서, 영화와 게임에서, 여행에서 얻은 소재가 딱히 무엇인지는 중요하지는 않다. 거기서 얻은 인상과 감흥을 회화적 요소로 구현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기에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거기에 실제로 가 봤는지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화면에 옮길 것인지가 더욱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내적 감성의 표현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과거 10여 년간의 표현적 회화가 최근의 건축적 구성으로 바뀌는 것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표현적 제스처도 건축적 구성도 이해은에게는 화면 위에서 이룰 수 있는 회화 세계의 여러 면면일 뿐이다.  

 

2010년대 중반 이해은은 물감 대신 파스텔을 사용하고 붓 대신 나이프를 사용하며 표현적 선의 회화에서 건축적 면의 구성으로 관심을 옮겼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은 최근 2~3년간의 작업결과인데, 유기적인 선과 색의 역동적인 리듬감은 견고한 면과 색의 구조적 공간감으로 대체되었다. 모니터와 패널이 가득 찬 증권시장, 연주가 한창인 콘서트홀, 경기가 열리는 대형 스타디움, 유리와 콘크리트, 강철의 고층건물이 즐비한 대도시, 그 사이를 오가는 분주한 움직임과 긴장감 넘치는 활기가 최근 이해은의 그림을 채우는 주제인데, 그것을 기하학적 색면으로 화면에 중첩하여 역동적인 회화적 공간감으로 실현한다. 20세기 초 파리의 시가를 빠른 걸음으로 활보하며 건물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에펠탑의 시각적 인상을 포착한 오르피즘 화가들이 떠오른다. 마치 벽돌을 쌓아 건물을 짓듯 납작납작한 작은 사각형의 색면을 견고하게 바르고 중첩하는 과정으로 화면 위에는 재현적 공간감이 아닌 시각적 일루전의 얕은 공간감이 만들어진다. 작은 사각형을 바르고 쌓는 과정에서 회화 평면의 견고한 직조감 또한 확인되는데, 화면 위의 시각적 일루전과 캔버스 표면의 물리적 실체는 서로 밀고 당기는 상호교차의 자장을 이룬다. 현실의 건축가가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3차원의 물리적 공간을 만든다면, 회화의 건축가인 이해은은 사각형의 면들이 밀고 당기고 겹치면서 2차원 화면 위에 얕은 시각적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2003년 이후 10여 년간 선과 색으로 음악적 리듬감을 구현하고자 한 이해은이 선의 안무가였다면, 기하학적 색면을 누적하고 병치하여 회화적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최근의 이해은은 면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앞서 표현적 회화가 열정적인 만큼 지금의 기하학적 회화도 경쾌하고 역동적인데, 선에서 면으로 조형적 관심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회화면 위의 조형이며, 이해은에게는 3차원의 현실세계보다 2차원의 회화세계가 더욱 흥미진진한 관심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은은 유럽의 전위 화가들이 기쁘게 실행에 옮기며 새로운 회화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지난 100여 년간의 동인을 여기 이 땅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검증하고 실행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면의 다채로운 조형 실험을 두루 섭렵한 이해은의 행보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가닿을지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마도 물리적인 세계보다 색과 형으로 재현된 세계가 한층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그의 회화를 보는 것만으로 누구나 그리 어렵지 않게 공감하기에 그러한 기대는 더욱 커진다.

2018  ' The City '  전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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